대한민국의 장례 산업의 시작부터 전개까지

2015-11-01     경기종합신문

대한민국의 장례 산업의 시작부터 전개까지

일제 시대 경성부에서 처음 운영한 신당리 화장장에서부터 해방 후 서울시립 홍제동 화장장에 이르기까지 제장(祭場)이라고 불리는 별도의 공간이 마련되어 있었다. 하지만 이곳은 화장하기 전 고별의식을 거행하던 장소였지 장례를 치르는 장소, 즉 장례식장이라고 보기는 어려웠다. 그리고 경성부와 같은 도시가 발전하면서 일본의 영향을 받아 집에서 장례를 치르는 것을 보조해주고 장례용품을 빌려주는 장의사 영업이 조금씩 자리를 잡아갔다.

그런데 전통적으로 우리나라에서는 집(엄격하게 말해 방)에서 임종하지 않으면 객사라고 하여, 시신을 집 안에 들여 장례를 치르는 것조차 금기시해왔다. 혹여 마을에 있는 물에 빠져 죽은 사람이라도 있으면 동구 밖에 차일을 치고 장례를 치르는 것이 보통이었다. 이런 전통은 1970년대까지도 그대로 이어져왔는데, 이것은 역으로 보면 장례 산업이 자리 잡을 수 있는 여지를 가지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반면에 우리의 미풍양속인 마을 공동체의 상부상조 전통과, 가족과 가까운 혈족 중심으로 장례를 치러온 관습은, 장례 산업이 체계적으로 발전하는 것을 가로막아왔다고 볼 수 있다. 마을의 원로나 일족 가운데에는 장례와 관련한 풍부한 지식과 경험을 가진 분들이 있어, 상주는 그들이 시키는 대로 따르면 별 문제 없이 장례를 치를 수가 있었다. 다시 말해, 전문 직업인의 도움 없이도 장례라는 큰 행사를 치르는 데 별 문제가 없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 사회가 조금씩 발전하며 여러 여건들이 변화하면서 장의사와 같은 직업이 등장하게 되었다. 그 가운데 가장 큰 영향을 미친 것은 급격한 도시화 과정에서 마을 공동체가 해체되고 핵가족화가 되어갔다는 점이다. 또한 1960년대 초반에 아파트라는 전혀 새로운 주거문화가 등장하면서, 많은 세대가 모여 사는 아파트의 특성과 건물 구조상의 제한으로 이곳이 장례를 치르는 데 부적합하다는 인식이 확산되었다.

우리나라의 의료 산업이 발전한 것도 장례 산업을 태동시키는 데 일조하였다. 사실 종전의 병원에서는 말기 환자들을 “집으로 모시고 가 편안하게 보내드리십시오”라고 권해 왔다. 그러다 의료기술의 발달과 함께 마지막까지 치료한다는 개념으로 전환되면서, 병원에서 임종을 맞이하는 사례가 점차 늘게 되었다. 병원에서 객사한 다음 집으로 모셔가 장례를 치르는 것은 전통적인 인식으로 볼 때 쉽게 받아들이기 어려웠을 것이다. 혹여 병원이나 밖에서 발생한 예기치 못한 사망인 경우, 병원에 부속된 시체 안치실 옆에 임시로 천막을 치고 장례를 치르던 것이 바로 병원 부설 장례식장의 태동이었다.

이런 사회적인 필요는 1973년 3월 13일자로 개정된 「가정의례에 관한 법률」에 그대로 나타났다. 즉 법 제5조에 아래와 같이 규정함으로써 장례식장 또는 장의사가 처음으로 법 제도권 안에 들어올 수 있는 길이 열리게 되었다.

가정의례를 행하는 식장을 제공하고 임대료를 받거나, 장의에 소요되는 기구·물품을 판매 또는 대여하는 것을 業으로 하는 者는 보건사회부장관의 허가를 받아야 한다.

이 법률이 시행된 후, 종전부터 장의사 영업을 하던 사람들에게는 그다지 문제가 없었다. 하지만 장례식장과 유사한 행위를 하던 병원 영안실들이 제도권 안에 들어오는 것은 사실상 봉쇄되었다. 그것은 이 법률 시행 규칙에 마련된 ‘시설 기준’ 때문이었다. 시행령 제2조 제2항 장례식장 시설 기준에, “장례식장의 위치는 도심지에서 떨어져 있을 것”이라고 명시된 것이 문제였다. 이로 인해 도심에 자리잡고 유사한 영업을 하던 병원 부설 영안실들이 합법화될 수 있는 길이 막혀버린 것이다.

이에 따라 몇몇 곳에서 전문 장례식장을 건립하려는 움직임도 있었지만, 법적인 제약 이외에도 아직 장례 산업이 본격적으로 발전하는 데는 여러 한계가 있었다. 가정과 가족 중심의 장례에 익숙한 사람들은 객사의 장례나 치르는 곳으로 인식되던 영안실에서 가족의 장례를 치르려고 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후 병원 영안실에서 장례를 치르는 사람들이 점차 증가하였다. 그러자 이번에는 의료계 쪽에서 “병원은 환자를 치료하는 곳이므로 장례를 치르면 중환자들에게 나쁜 영향을 준다”라는 이유로 반대의 목소리를 높였다. 그리고 보건사회부에서는 “불법 장례식장인 병원 영안실을 엄단한다”라는 엄포를 계속 놓았다. 하지만 병원 영안실에서의 장례는 나날이 증가하였다.

그 과정에서 ‘영안실의 바가지 상혼’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도 언론 보도를 통해 이어졌다. 이렇게 한국 장례식장은 첫 단추를 잘못 끼운 탓에 불법과 탈법이 판치는 곳으로, 또 일각에서는 엄청난 떼돈을 버는 곳으로 인식되어갔다.

그러다 1981년 3월 16일 시행 규칙에 규정된 장례식장의 시설 기준을 시행령으로 옮기며 예의 그 조항이 삭제되면서 병원 부설 영안실이 사면 복권되었다. 이로써 장례식장이 도심지에 들어올 수 있는 길이 열리기는 했지만, 실제로 병원 영안실이 장례식장으로 인정받은 것은 1994년 7월 7일 법 시행령에 「장례식장의 시설 기준」으로 “의료기관의 부대시설로서 설치하는 장례식장”이라는 문구가 들어간 다음부터라고 할 수 있다.

1990년대에는 정부의 「전문 장례식장 육성 방침」에 따라 지방의 중소도시에 장례식장이 건립되었고, 병원 부설 장례식장에 대한 시설개선자금 융자지원제도가 시행되었다. 이로 인해 장례식장을 중심으로 장례 산업은 꽃을 피웠지만, 동네 장의사들은 줄지어 퇴장하게 되었다.